루이 8세
최근 수정 시각: (5년 전)
이름 | 루이 8세 사자왕(Louis VIII le Lion) |
생몰년도 | |
재위기간 | |
출생지 | |
사망지 | 프랑스 왕국 상파뉴 |
배우자 | 블랑슈 드 카스티야 |
1. 개요 [편집]
프랑스 왕국의 국왕이자 아르투아 백작. 카페 왕조 8대 왕으로 필리프 2세와 이사벨 드 에노의 아들. 1200년 블랑슈 드 카스티야와 결혼했으며, 잉글랜드 왕국의 존 왕은 처숙부였다.
프랑스 국왕에 즉위한 뒤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던 알비즈와 십자군을 통해 남부 프랑스의 광대한 왕령을 가지게 되었지만 파리로 돌아오던 도중에 이질에 걸려 병사하였다. 비록 요절했지만, 왕자 시절부터 사망하기 직전까지 무수한 전공을 세웠다. 아버지 필리프 2세를 대신해 군대를 지휘하는 경우가 잦았고, 결정적으로 잉글랜드 정복전에서는 존 왕을 성공적으로 격파해, 부빈 전투의 승리에 일조했다.
이처럼 재위기간 중 잉글랜드 왕위 계승을 위한 정복전쟁을 치렀는데, 이는 존 왕의지긋지긋한 통치에 질린 대립 제후들이 프랑스 왕 루이 8세에게 존을 대신해 잉글랜드를 다스려 달라 청원한 것에 따라 이뤄졌으며, 그의 왕비에게 잉글랜드 왕위에 대한 명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1216년 잉글랜드로 원정을 떠나 성 바울 성당과 윈체스터 사원과 왕궁의 절반을 빼앗는 등 연승을 거뒀고, 삽시간에 잉글랜드 남부를 정복했다. 그러나 루이 8세의 본대가 후방의 도버 성을 공략하기 위해 공성을 치르는 동안, 프랑스파 귀족들이 링컨 전투에서 격파되고 바다에서도 패한데 이어, 존 왕의 급사로 어린 헨리가 즉위하자 잉글랜드 제후들이 태도를 돌변하여 그에게 철군을 요구해왔다.그러나 피는 못 속이는 법인지 헨리 3세 때도 잉글랜드 제후들은 불평이 많았다. 어쩔 수 없이 1217년 램버스 조약을 맺고 잉글랜드 왕위를 포기했다. 다만, 그의 본대는 패한 적이 없는데, 사자왕이라는 칭호는 이때의 군공에서 비롯된 것이다.[1]
그는 부왕 필리프 2세보다 가차없는 성품이고 전쟁터에선 잔인한 면모가 있었다고 한다.
카페-앙주 왕가가 루이 8세의 대에서 갈라져 나왔다. 유복자 샤를이 앙주와 멘의 영주가 되었고 이후 시칠리아 왕위까지 손에 넣으면서 그의 자손은 유럽의 유력한 왕가가 된 것.
이처럼 재위기간 중 잉글랜드 왕위 계승을 위한 정복전쟁을 치렀는데, 이는 존 왕의
1216년 잉글랜드로 원정을 떠나 성 바울 성당과 윈체스터 사원과 왕궁의 절반을 빼앗는 등 연승을 거뒀고, 삽시간에 잉글랜드 남부를 정복했다. 그러나 루이 8세의 본대가 후방의 도버 성을 공략하기 위해 공성을 치르는 동안, 프랑스파 귀족들이 링컨 전투에서 격파되고 바다에서도 패한데 이어, 존 왕의 급사로 어린 헨리가 즉위하자 잉글랜드 제후들이 태도를 돌변하여 그에게 철군을 요구해왔다.
그는 부왕 필리프 2세보다 가차없는 성품이고 전쟁터에선 잔인한 면모가 있었다고 한다.
카페-앙주 왕가가 루이 8세의 대에서 갈라져 나왔다. 유복자 샤를이 앙주와 멘의 영주가 되었고 이후 시칠리아 왕위까지 손에 넣으면서 그의 자손은 유럽의 유력한 왕가가 된 것.
2. 대중매체에서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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